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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 1일 (일) / 제 26 회 ''유신전야'' (마지막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공작과 거대한 물량공세로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구상한다. 국무총리에 임명된 김종필을 견제하던 공화당의 김성곤, 백남억등이 JP계인 내무장관 오치성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자 박정희는 중정을 통 해 이들을 잡아들인다. 정계에 국회해산, 친여쿠데타 루머가 무성한 가운데 중정부장 이 후락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이후락의 건의로 박정희는 남북 적십자회담을 전개, 마침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다. 궁정동 안가에서 비밀리에 제정중이던 소위 유신헌,1972.10. 17 박정희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야 만다.
제3공화국 26 회 1993-08-01MORE
1993년 7월 25일 (일) / 제 25 회 ''40대 기수론'' 박정희의 3선개헌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이후락과 김형욱은 권력 형 축재로 전격적인 해임을 당한다. 신민당의 김영삼, 김대중, 이 철승은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 마하고 야당중진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신민당수 유진산은 자신 의 후보 출마문제로 고민한다. 한편, 박정희는 중정부장 김계원에게 유진산을 신민당 대통령 후 보로 만들 공작을 지시하고, 번민하던 유진산은 마침내 김영삼을 후보로 이에 열세에 놓인 김대중은 이철승을 포섭, 대역전극을 연 출하며 신민당 후보로 당선된다.
제3공화국 25 회 1993-07-25MORE
1993년 7월 18일 (일) / 제 24 회 ''3선 개헌'' 3선개헌은 결코 하지않을 것이라는 박정희의 발언에도 불구하 고 공화당은 이후락, 김형욱을 중심으로 3선개헌의 준비작업에 몰두한다.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친JP계의 복지 회사건으로 김종필은 궁지에 몰리고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정 치생명을 건 개헌저지투쟁을 벌인다.신민당은 재야와 재야와 연계해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위를 구성하여 전국적인 저지 투쟁을 전개하지만 공화당은 국회 제3별관에서 단독으로 날치 기 통과시킨다.
제3공화국 24 회 1993-07-18MORE
1993년 7월 11일 (일) / 제 23 회 ''김두한과 사카린 밀수사건'' 부총리실 캐비넷에서 나온 귀금속들로 중정부장 김형욱은 고위 공직자 기강 운운하고 한편으론 이후락, 김성곤 등과 정치자 금 모금에 몰두한다. 김종필의 생일잔치에서 공무원의 요정 출 입 문제로 김종필계는 박정희에게 심하게 반발하고 이에 박정 희는 대노한다.정치자금 헌납과 맞물려 삼성의 한국비료사건 과 사카린 밀수사건은 터지고 야당은 정경유착이라고 규탄하 며 철저한 규명을 요구한다. 삼성의 밀수사건 대정부 질의에 나선 김두한은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하는 해프닝을 벌이 고 궁지에 몰린 박정희는 삼성의 이병철에게 한국 비료의 국 가헌납을 강요한다.
제3공화국 23 회 1993-07-11MORE
1993년 7월 4일 (일) / 제 22 회 ''월남파병'' 청구권 문제를 둘러싼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가 전국 을 휘몰아치던 1964년 겨울, 박정희는 비밀리에 월남파병 계획을 추진한다. 외무부장관 이동원을 앞세워 미국에 파병에 따른 선결 조건을 제시하지만 미국의 반대에 부딪치자 박정희는 차지철로 하 여금 여당내에 파병 반대를 선동하라는 전략적인 지령을 내린다. 시위 도중 사망한 한 학생의 시위 도중 사망한 한 학생의 죽음은 정계에 엄청난 파급을 가져오고 야당은 결사의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여당일당국회를 통해 한일협정 비준동의안과 월남파병 동의안을 통과시키고 위수령을 발동, 군대의 힘으로 국 민적 저항을 억누르고 만다.
제3공화국 22 회 1993-07-04MORE
1993년 6월 27일 (일) / 제 21 회 ''진산파동'' 계엄사태의 책임을 언론에 돌리고 있던 박정권은 동아일보에 무장 군인을 난입하는 사태를 만든다. 제도적으로 언론을 규제하기위 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이 정부에 의해 제안되는데 야당은 법 반대 를 위한 극한 투쟁을 선언했다가 막상 국회에서 표결에 붙이자 슬 그머니 퇴장해버리는 수상쩍은 태도를 보인다. 법 철폐를 위해 언 론계는 극한 투쟁을 선언하고, 마침내 박정희는 법시행의 전면 유 보를 발효한다. 한편 야당은 언론법 통과시 유진산과 여당의 묵계설로 심한 갈등 을 겪는데 결국 윤보선은 진산을 당에서 제명시키고 만다.
제3공화국 21 회 1993-06-27MORE
1993년 6월 20일 (일) / 제 20 회 ''6.3 사태, 下'' 김종필. 오히라 데모토 한일 양국이 국교정상화에 대한 실질적인 협의를 보자, 국민들은 고작 청구권 3억불로 36년간 일본의 수탈 을 묻어버렸다고 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대학가의 데모는 민족 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으로 정점에 달하고, 중앙정보부는 학원사찰 을 통해 대학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 정부는 국민들의 입을 봉쇄 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
제3공화국 20 회 1993-06-20MORE
1993년 6월 13일 (일) / 제 19 회 ''6.3 사태, 上 '' 정치자금과 경제개발 자금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박정희 는 한일회담을 타결짓고 그 청구권 자금으로 돌파구를 찾고자 국 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회담 강행에 나선다. 그동안 군사정권의 위압에 눌려 지내던 학생들은 매국적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4.19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를 벌인다. 한일회담 타결을 위해 일본을 방 문한 김종필은 국내의 거센 반대데모 때문에 서둘러 귀국하고, 한 편 국내에서는 김종필을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계획이 수립되기 도 한다.
제3공화국 19 회 1993-06-13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