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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11일 (일) / 최종회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가 경호 차량을 타고 당당한 모습으로 청와 대에 도착한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노 당선자를 맞은 전두환은 자신이 '국가원로 자문회의' 의장 자격으로 국정에 관여 할 뜻을 밝힌다. 게다가 퇴 임 전에 군 인사까지 단행 하겠다고 한다. 전두환은 조기총선을 통해 국회의원 공천권까지 행사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노태우는 공천권만은 양보할 수 없다며 이를 막을 방법을 모색한다. 김윤환, 최병렬은 노태우에게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5공과의 단절 이 불가피하다며 언론에서 새마을운동본부 비리를 문제 삼고 있 는 이번 기회에 전경환을 구속시켜 단절의지를 보여야한다고 주장 한다. 결국 노태우는 언론과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전경환을 구속 시키고 전두환은 기자회견을 통해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4.26총선은 노태우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역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의 국회를 탄생시켰고 5공비리와 광주문제는 정국의 최대이슈로 부상하게 된다. 전두환이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의시를 밝히지만 노태 우는 시기가 좋지 않다며 거절한다. 노태우의 순방 기간 중에 정호영이 전두환을 찾아가 잠시 서울을 떠나 있으면 모든 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겠다며 떠나 줄 것을 부 탁한다. 결국 전두환은 완전한 5공 청산을 약속받고 백담사로 떠난다. 하지 만 당초 노태우의 약속은 국민의 분노와 야권의 공세에 밀려 지켜 지지 않았고 전두환은 2년이 넘는 세월을 백담사에서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89년 12월 전두환은 국회 증언대에 서게 된 다. 정국의 주도권이 야권으로 완전히 넘어간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태 우는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90년 1월 3당 합당을 이뤄내지만 이것 은 문민정부 탄생의 발판이 된다. 이는 5공인사들에겐 또 다른 역사의 가시밭길을 예고하게 된다.
제5공화국 41 회 2005-09-11MORE
2005년 9월 10일 (토) / 제 40 회 1960년,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버려져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고등학생 김주열군의 죽음이 4.19혁명으로 이어졌듯이,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987년 6월, 박종철군과 이한열군의 죽음은 철권통치를 꿈꾸던 제5공화국에 6.29선언이라는 백기항복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격렬한 시위끝에 경찰에 쫓긴 1천여명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계속했고, 정부에서는 강경진압이냐, 해산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학생들을 격려하는 대자보를 써붙이기도 했고 도시락과 용돈을 건네주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사회를 열망하는 마음을 시민들이 직접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5공화국 40 회 2005-09-10MORE
2005년 9월 4일 (일) / 제 39 회 이순자는 전두환에게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우는게 마음에 들지 않고 전두환은 그런 이순자를 안심시킨다. 노태우는 김옥숙에게 자신이 대통령이 될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고생이 끝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옥숙은 왠지 불안해한다. 용팔이는 이용구의 지시대로 야당 창당을 막기위해 당사에 쳐들어 가 난장판을 해놓는다. 이런 사태에도 위에서 지시를 받은 경찰들은 모른채 넘어간다. 안기부와 신민당의원들까지 합세한 창당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통일민주당이 출범한다. 국회의원 66명을 보유한 제1야당이 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총재는 취임사에서 직선제 개헌을 위한 전면투쟁을 선언한다.
제5공화국 39 회 2005-09-04MORE
2005년 9월 3일 (토) / 제 38 회 박철언이 노태우에게 장세동을 견제하기 위해 정호용을 내무장관에 앉히자고 건의한다. 이춘구는 전두환에게 정호용을 후임 내무장관에 추천하지만 전두환은 옛일을 떠올리며 정색한다. 그러나 전두환은 노태우의 설득으로 정호용을 내무장관에 임명한다. 장세동은 전두환에게 대통령 후계구도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하자 전두환은 자신의 내각제 시나리오를 장세동에게 말해준다. 권력누수를 막기 위해 후계구도에 관한 한 모호한 태도를 취해왔 던 전두환은 공개석상에서 노태우를 후계자로 삼을 것임을 공식적 으로 처음 언급한다. 후계자로 지명받기 위해 7년여를 철저한 몸낮 추기로 일관해온 노태우는 감격해 한다.
제5공화국 38 회 2005-09-03MORE
2005년 8월 28일 (일) / 제 37 회 치안본부 남여동 분실에서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다. 장세동은 이학봉을 통해 김윤환이가 차기대권으로 노태우가 가장 자연스럽다는 말을 전해듣는다. 이 사실을 장세동은 전두환에게 보고하고 노태우에게 즉각 경고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전두환은 자신이 노태우에게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고 보고, 허문도의 생각대로 안기부를 통해 김윤환을 겁주기로 한다. 장세동은 노태우에게 전화해 김윤환이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말해주는데...
제5공화국 37 회 2005-08-28MORE
2005년 8월 27일 (토) / 제 36 회 금강산댐 물폭탄 시나리오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던 전두환은 학생운동이 점점 확산되자 비상계엄을 고려한다. 전두환이 국면 전환을 위한 중요조치를 곧 내릴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김대중은 제2의 광주를 또다시 만들 수는 없다며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대통 령이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발표 를 한다. 전두환은 안기부로부터 홍콩에서 납북미수사건이 있었다는 보고 를 받는다. 여간첩이 남편을 유인해 납북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윤택식의 단순 살인사건으로 밝혀진다. 안기부 가 사기꾼의 거짓말에 속고 만 것이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안기부 장 장세동은 전두환에게 독대를 청하고는 이 사건을 금강산댐과 같이 정국 전환용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보고한다. 결국 이 사건은 장세동의 시나리오대로 여간첩 수지김의 납북미수 사건으로 알려지고 살인자 윤태식은 보안사에 철저한 세뇌 교육 과 보안 교육을 받은 뒤 방면된다.
제5공화국 36 회 2005-08-27MORE
2005년 8월 21일 (일) / 제 35 회 정부여당의 총선패배는 노태우에게 후계자로 가는 길목이 되었으 나, 개각으로 장세동은 전두환의 확고한 정치적 신임를 받게되고 또한 경질이 예상되었던 노신영에게 총리직을 맡김으로써 전두환 은 차기후계 구도를 자연스럽게 노태우-노신영-장세동 라인으로 형성한다. 또한 전두환은 예상 밖의 신민당 총선승리로 정치규제자들의 해 금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부상할 것을 우려해 전면적인 해금조치 를 단행. 이로 인해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적으로 부활하며 이들 에 의해 야권통합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진다. 한편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80년 광주 미문화원 방화 사 건과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뒤이은 것으로 광주문제가 학원가의 최대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1985년 이후, 광주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대학가와 총선 1주년을 맞아 김대중, 김영삼을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한 신민당은 전두환 의 영구집권을 막기위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추진 1천만서명운동을 시작하며 전두환을 양면에서 압박한다. 곧이어 부산 광주 대구에서 개헌추진대회가 연달아 열리면서 개 헌 열기는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자 민중혁명을 우려한 5공 세력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건국이후 최대의 사기극 금강산땜 조 작사건을 꾸미는데...
제5공화국 35 회 2005-08-21MORE
2005년 8월 20일 (토) / 제 34 회 기업들이 일해재단의 성금 모금으로 부담이 크다는 불만들이 나오 자 전두환은 곧 본보기로 국제그룹의 은행여신 865억지원을 중단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노태우는 총선에 서울 서대문구 출마를 전두환에게 권유받지만 낙마를 염려해 전국구 지원을 박철언과 검토한다. 은행여신 지원 동결로 부도처리 위기에 놓인 양정모는 일전에 기 업을 죽일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전두환의 이야기를 상기 하고 위기를 모면하려 동분서주하지만 진퇴양난으로 미국에 있는 아들의 사고사 소식을 듣게된다. 한편 민추협이 총선에 대비 김대중의 귀국을 추진한다고 하자 전 두환은 부산의 최고기업 국제그룹의 문제는 잠시 총선뒤로 미루기 로 한다. 전두환은 신한민주당의 기세를 잠재우기 위해 총선날짜를 겨울인 2월12일로 잡았고,신한민주당은 총선을 불과 한달도 안 남겨둔 상 태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신당인 신민당이 민정당과 민한당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조 각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선거결과는 민정당이 총 148석으로 과반수를 차지했고 신한민주당이 67석으 로 제1야당이 된다. 전두환은 부산의 총선거구 중 5개가 신한당이 당선되자 부산에서 양정모 선거활동의 부진을 탓하며 국제그룹의 공중분해를 명령하 는데...
제5공화국 34 회 2005-08-20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