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3월 22일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등 혁 신계는 대규모 횃불시위를 열어 장면 정권의 타도를 외친다.
시위의 내용과 목적에 위기감을 느낀 여야는 1961년 3월 23일 청와대에서 요인들이 모여 회담을 갖지만 서로의 잘못만 탓하며 정쟁으로 옮아간다.
윤보선 대통령(이순재), 장면 총리(김무생), 곽상훈 민의원 의장(김길호),백낙준 참 의원 의장, 김도연 신민당 의원(김인태), 유진산 신민당 의원(심양홍), 현석호 국방 장관(변희봉), 양일동 신민당 의원, 조한백 의원이 참여한 이른바 청와대 요인회담 은 철저히 비밀에 붙이기로 했으나 기자의 유도심문에 걸린 백낙준 참의원 의장이 모든 것을 말하는 바람에 들어나게 된다.
사실을 알게된 민주당의 이석기 원내총무는 윤보선 대통령이 내정에 지나친 간섭을 한다며 규탄하고 양일동 신민당 원내총무는 그런 민주당을 비난함으로써 여야의 갈 등은 더욱 깊어진다.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 박정희 소장(이진수)은 김종필(이정길)과 만나 군사혁명 계 획서를 검토하는 한편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김동현)을 찾아가 계엄령 시행 계획서 를 제출한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의 음모를 감지하고 장도영 총장을 불러 이야기하지만 장도영은 사실을 부인하다.
박정희의 집에 모인 쿠데타 세력은 지난번 정했던 4월 19일의 쿠데타를 위해 은밀한 논의에 들어간다.
1961년 4월 19일 4월혁명 1주년 기념일을 맞아 정부와 군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우려해 비상체제에 들어가지만 학생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정부는 안도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평화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된 박정희는 4.19 쿠데타가 실패했 음을 알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