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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데뷔 49년, 트로트 황제 태진아의 전성시대
데뷔 49년, 트로트 황제 태진아의 전성시대와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태진아의 성공
비결이 공개된다. 당대 최고 인기 연예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태진아의 이름은 배
우 태현실의 ‘태’, 가수 남진의 ‘진’, 가수 나훈아의 ‘아’를 따서 만들어졌다. 1972년 <
내 마음 급행열차>로 데뷔한 태진아는 1974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신인상을 수
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89년 발표한 <옥경이>로 앨범 150만장 판매기록을 남
기며 대성공한다. <거울도 안 보는 여자>, <미안 미안해>, <동반자> 등 발표하는
곡마다 연달아 히트를 치고 그야말로 태진아의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최고의 트로
트 가수로 손꼽히며 태진아는 송대관, 현철,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
리고 있다. 그가 받은 트로피만 무려 217개! 대한민국 남녀노소 모두가 아는 가수이
자 예능인이 된 태진아의 전성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트로트는 저한테 목숨과도 같아요. 제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죠.”
- 가수 태진아 인터뷰 중에서 -
"(태진아 선생님은) 그냥 넘사벽이에요.
‘태진아’라는 이름이 브랜드가 그 자체이고 인생 자체가 전성기 같아요.”
- 개그우먼 정선희 인터뷰 중에서
■ 열네 살 구두닦이 소년, 트로트 대부가 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로트 가수가 되기까지 태진아에게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충북 보은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태진아는 가난한 가정 형편 탓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구두닦이부터 중국집 배달, 식당 종업
원, 택시 기사 등 그가 거쳐 온 직업은 무려 38가지. 요즘은 카페 사장님으로 변신해
청소와 꽃꽂이, 손님 응대까지 바쁜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가수 태진아의 성공 뒤에는 영원한 동반자인 아내 이옥형 씨와 아들이자 가수인 이
루가 있다. 한때 트로트 황제인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있던 아들 이루는 인도네시아
에 진출하여 한류 가수로 거듭났다. 이제는 제작자이자 연기자로도 활약하고 있는
가수 이루. 태진아의 대표곡인 <동반자>는 태진아가 작곡을, 아들 이루가 작사를
한 노래이다. 최근 발표한 신곡 <고향 가는 기차를 타고>는 아들 이루가 아버지를
위해 작사와 작곡까지 한 작품이라고 한다. 한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에 대해 어떤 진심을 전해줄까. 아들과 함께 하는 예능 나들이 현장부터 아들이 출연
한 드라마의 열렬한 시청자가 된 태진아의 인간적인 모습이 공개된다.
태진아에겐 ‘제 2의 아들’ 혹은 양아들이라 불리는 가수 강남이 있다. 연말무대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트로트 듀오 활동까지 이어졌다. 용돈과 식사를 챙겨주는
것은 물론 강남의 결혼식에서 주례까지 설 만큼 든든한 ‘한국의 아버지’가 된 태진
아. 그가 후배가수를 남달리 챙기는 이유 그리고 강남과 함께 도전한 SNS 라이브 방
송현장을 공개한다.
"아버지가 가족에게 한 만큼 할 자신이 저에게는 없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자신이 생기겠죠.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니까요.”
- 가수 이루 인터뷰 중에서 -
"진짜 제가 잘됐음 좋겠다고 항상 그런 얘기들을 해주세요.
(태진아 선생님과는) 정말 운명적인 만남 같기도 하고. 제가 더 잘해야죠.”
- 가수 강남 인터뷰 중에서 -
■ 영원한 현역가수 태진아, 끊임없는 도전기
데뷔 49년차 트로트 가수 태진아는 휴일 없이 바쁜 스케줄을 강행하고 있다. 코로나
로 인해 행사 무대는 취소됐지만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섭외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신곡 발표 준비로 더욱 바빠졌는데, 파격적인 무대를 위해 준비
하고 있다. 의상에 거울을 붙이고 출연한 <거울도 안 보는 여자>부터 노란 손수건
을 흔들며 등장한 <노란 손수건>과 한복을 입은 <김선달> 등 남다른 패션 감각을
선보이는 태진아의 무대는 늘 화제가 되어왔다. 유재석이 트로트 가수로 변신했던
유산슬의 데뷔 의상부터 요즘 ‘1일 1깡’으로 대세를 입증한 가수 비와 선보였던 <라
송 LA SONG>에서 선보인 털옷 패션까지 독보적인 패션을 선보이는 태진아가 신곡
무대에서 선보일 파격적인 의상을 공개한다. 이번 무대를 위해 트로트 여성그룹과
콜라보를 준비하면서 땀 흘리는 예순아홉 살의 트로트 대부, 태진아.
내년이면 태진아도 데뷔 50년차 가수가 된다. 트로트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목숨 같
다고 하는 트로트 황제 태진아.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로 남고 싶
다는 그는 지금도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영원한 현역가수 태진아의 열정과 흥
이 넘치는 인생 이야기는 오는 21일 (일) 오전 8시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서 만날 수 있다.
"가수로서의 욕심은 내가 쓰러질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은 것, 그것만 욕
심이에요. 저는 죽으면서도 노래를 부르다 죽어야 되는 가수니까요.”
- 가수 태진아 인터뷰 중에서
■ 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 그가 돌아왔다!
동양인이, 아시아인이, 또 한국 사람이 우승하기 어려운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 대단한 전설이죠.
- 김성주 int
한국 테니스의 시작이죠. 한국 테니스는 이형택을 빼놓고 말할 수 없죠.
- 전미라 int
한국인 최초 ATP투어 우승, 단식 42연승 기록, 세계랭킹 36위 달성! 테니스 불모지
한국에서 경이로운 기록을 남긴 레전드, 이형택의 이야기다. 그의 기록은 오랜 시간
깨지지 않았고 수많은 "최초”와 "최고” 타이틀을 남겨왔다. 은퇴 후에도 미국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테니스 라켓을 놓지 않은 이형택. 그런데 그는 요즘 코트가
아닌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최근 축구예능 <뭉쳐야 찬다>에서 깐족 아재로
활약 중인 이형택. 이제는 테니스화보다 축구화가 신발장을 채우고 박태환, 모태범,
김동현 등 스포츠 스타들이 모인 축구 경기에서 다시금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다.
늦깎이 방송인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 이형택의 현재를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한다.
■ 생각만으로도 눈물 나는 사람, 나의 어머니
지금의 레전드 이형택이 되기까지는 어머니의 힘이 컸다. 집안 곳곳 아들 이형택의
사진과 기사들로 가득 찬 어머니의 집에는 아들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삼형제를 키운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떠났었고, 삼형제는 강원도 할머니댁에 맡겨졌다. 힘든 식당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첫 테니스라켓을 선물하기도 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마음에는 어린 형택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과 선수시절 뒷바라지를 못해
준 것이 아직도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집안의 가장으로 강해져야만 했던 어머니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늘 이형택을 응원해왔다. 아들 형택은 어린 시절부터
칭찬에 인색했던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아빠가 된 후 뒤늦게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많이 나와요.
운동을 하다 말고 힘들어서 쉬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렇게 쉬는 동안에도 우리 엄마는 돈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 식당에서 일을 하는데... 내가 이렇게 쉬어도 되나?‘
그래서 더 열심히 운동을 했었어요.
- 이형택 int
아들이 우승해서 전화오면 "축하해” 이 소리를 못하고
"교만하지 말아”, "자만하지 말아” 그랬죠.
ATP 투어 우승하고 돌아왔는데 그때 처음으로
"우리 형택이 참 엄마가 사랑해” 하는데 눈물이 그렇게 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눈물이 나니까 형택이도 울더라고요.
"엄마한테 처음 들어보는 소리야”...
- 어머니 최춘자 int
■ 그리운 가족과의 재회! 가족에게 소홀했던 아빠 이형택
10년 연애 끝에 결혼 후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이형택. 은퇴 후, 가족들과 미국에서
지내며 테니스 아카데미에 전념했던 그는 방송활동을 위해 한국에 들어와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 6월은 이형택에게 특히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방학 기간이 늘어난 아이들이 한국에 잠시 들어왔기 때문.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항상 바빠서 가족을 챙기지 못했던 그는 요즘 남편, 아빠로서
열심이다. 집안일은 물론 세 아이들 송은(15), 창현(14), 미나(10)를 데리고 캠핑을
떠나기도 하는데. 오랜만의 외출에 아이들 보다 더 신난 아빠 이형택은 가족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감사하고 즐겁다. 그런데 신나게 놀던 막내딸 미나가 갑자기 아빠
때문에 울음을 터트렸다. 미나의 눈물의 이유와 아빠를 향한 막내의 귀여운
고백까지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보자.
■ 영원히 놓지 않을 테니스 라켓
인생 코트에서 펼쳐지는 끝없는 도전!
저에게 테니스란 평생 뗄 수 없는 동반자!
죽을 때까지 테니스와 이형택이 항상 붙어있어야 되는 그런 것 같아요
- 이형택 int
마흔 다섯, 중년이 된 이형택.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요즘 웨이트 운동을 하며
현역 시절만큼 몸 관리를 한다. 선수도 아닌 그가 이렇게 열심히인 데는 이유가
있다. 계속 테니스를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비해
열악한 한국 테니스 환경을 변화시키는데 힘쓰고 있는 그의 새로운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프로를 꿈꾸는 주니어 선수의 코칭을 나서 다시 코트를 누비는가
하면, 요즘은 방송 출연에도 더 적극적이다. 이런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면 테니스에
대해서 한 명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인데. 관심이 곧
한국 테니스의 발전과 후진양성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이형택. 자신이 세운 ‘최초’
기록을 깰 수 있는 한국 테니스의 자존심을 만들기 위한 그의 도전을
<사람이 좋다>에서 함께한다.
▶ 정의로 똘똘 뭉친 소년, 셜록을 만나 미래를 꿈꾸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아이, 그래서 늘 주먹이 먼저 나갔던 아이, 반항아
기질이 강한 모범생. 이 모든 수식어의 주인공은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범죄
심리학자이자 20대 국회의원 표창원이다. 어린 시절, 정의와 의협심으로 가득했던
소년이었지만 그의 정의감은 늘 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 표창원은
우연히 읽게 된 소설 속에서 인생의 멘토인 ‘셜록 홈즈’를 만났다. 침착하게 추리와
논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소설 속 주인공 셜록 홈즈는 ‘폭력 없이도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인생의 메시지와 함께 소년 표창원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부모님이 늘 강조하셨던 참을성의 필요성을 셜록 홈즈 이야기 속에서 찾았죠.
‘스스로 부끄러워지고 참을성이 있어야만 수사라는 걸 할 수 있구나,
참을성이 있어야만 여러 오해와 속임수와 기망의 장치들을 다 헤쳐내고
진실을 밝힐 수 있구나’라는 것을 셜록 홈즈를 통해서 깨달았던 거죠.
폭력이 아닌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을 깨달았던 거고요.
-표창원 int 中-
셜록을 꿈꾸던 그에게 다가온 대학 입시. 평소 정치외교학과와 신문방송학과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친구가 운명처럼 건넨 한 대학 입학홍보자료를 보고
단숨에 진로를 결정했다. ‘조국, 정의, 명예’라는 학훈에 매료되어 경찰대학 진학을
결정한 표창원.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던 정의감이 마침내 경찰이라는 결실로
처음 뿌리내린 순간이었다.
경찰대학 졸업 이후 꿈에 그리던 경찰이 된 표창원은 한국의 셜록이 되길 꿈꿨다.
하지만 당시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과 본인이 수사를
담당한 ‘1992년 대입 학력고사 문제지 도난 사건’이 미제로 남으며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된다. 국내 수사력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안정된 생활을 뒤로하고, 유학의
길을 선택한다. 셜록의 나라 영국에서 범죄수사 전문교육을 받으며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돌아온 그는 경찰대 교수로 자리 잡는다. 대한민국 최초의
경찰학 박사로 불리며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된 그는 국내에서 가장 지명도 있는
범죄 심리학자로 활동하며 대중에게 표창원 이름 세 글자를 각인시켰다.
그러나 그에게 다시 한번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온다. 2012년, ‘국정원 여론조작
의혹사건’으로 경찰의 소극적인 수사를 비판하는 표창원의 발언이 화제가 되자,
그가 몸담고 있는 경찰대학에 비난이 집중된 것. 본인의 소신으로 인해 조직이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공개 사직서를 제출하며 13년간 몸담았던 경찰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안정된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당시 경찰청, 경찰대학 홈페이지에 저에 대한 파면 요청이 올라갔어요.
경찰대학은 업무 마비 상태가 되고,
학생들이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여서 그걸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는 건 저 다운 게 아니거든요.
거기서 제가 내려야 할 선택은 경찰대 교수직을 버리는 거였어요.
-표창원 int 中-
국립 경찰대학교수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우리는 못해요. 표창원이니까 했죠.
-당시 경찰 동료 김정섭 int 中-
▶ 경찰, 교수를 거쳐 정계에 진출하다
경찰대학교수 사직 후, 표창원은 정계 입문이라는 행보로 다시 한번 변화를
선택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인재영입 1호로 지목되며 정계에
진출한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 출마했다. 인간 표창원의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과반이 넘는 득표율로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한 표창원은
‘공수처 법’, ‘형사소송법 개정’, ‘해인이 법’ 등의 제정에 힘썼다.
임기 동안 100%에 가까운 국회 출석률을 자랑하며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한 그는
사적인 모임도 마다하며 4년 내내 국정에만 집중했다. 때로는 사이다같이 시원한
발언으로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도 하고,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함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인지도와 지지도가 높았던 표창원은 재선이 유력했던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러나 박수 칠 때 떠나라고 했던가, 그는 돌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다시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표창원 교수님의 불출마에 대해서는 다들 되게 충격받았어요.
누구보다 잘했고 의정 활동할 때 같이 이야기도 하고,
생각도 나누고 그랬는데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안쓰럽더라고요,
‘마음고생 많이 하셨구나’하고..
-주진우 기자 int 中-
‘국회의원으로서의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라는 마음이 가장 커요.
재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달려오다 보니까
남들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거죠. 4년 내내 열심히 해왔고,
그리고 이 4년에서 그치지 않고 더 할 경우를 생각해봤을 때,
사회가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것에 따라 내가 바뀌어 가고,
적응해 나갈 게 너무 명확히 보였어요. 그래서 이건 저랑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나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여기까지다 생각한 거죠.
-표창원 int 中-
▶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자연인 표창원의 인생 2막
불출마 선언 이후, 국회의원 표창원의 삶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운전기사 없이 직접 운전을 해 국회로 출퇴근을 하고 새로 올 당선자에게
넘겨줘야 하는 사무실 짐도 직접 비운다. 남은 의정 활동 또한 성실히 해나가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찰에서 교수로, 교수에서 국회의원으로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인생. 이제는
이름 앞에 ‘자연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그는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젊은 날의
체력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배 나온 중년의 아저씨가 된 표창원이지만 마음만큼은
꿈 많은 청춘이다. 요리 배우기, 운동하기, 글쓰기처럼 거창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일에 치여 누리지 못했던 평범한 일상의 소소함을 누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
자연인 표창원의 바람이다.
영원한 셜록을 꿈꾸는 표창원, 정치인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표창원의
마지막 국회 여정과 새로운 삶을 위한 도전을 <사람이 좋다>에서 함께한다.
자유인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나 국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범시민이라고 할 수 없겠죠?
그래서 저는 모범시민이 되고 싶어요.
시민으로서 사적인 자유를 만끽하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사회적 공헌을 하고 싶고요,
대한민국의 셜록 홈즈로서 제 자리와 위치를 구축하며
열심히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생각입니다.
-표창원 int 中-
◆ 40년 탁구 인생, 전설은 계속된다.
"행복하게 선수 시절을 보냈고 마무리도 탁구로 끝나지 않을까...”
- 현정화 인터뷰 中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여자 탁구 단체 결승전. 온 국민이 세계최강 중국과의
승부를 숨죽여 바라보던 그때, 상대를 얼어붙게 만드는 전매특허 강력한 스매싱
으로 강호 중국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당당히 우승, 금메달을 목에 건 18살 소녀,
국가대표 현정화였다.
그리고 2년 뒤, 국민 영웅 현정화를 탄생시킨 순간이 찾아왔다. 탁구가 정식종목
으로 채택된 첫 올림픽이자 대한민국에서 열린 첫 번째 올림픽이었던 1988년 서울
올림픽. 온 국민의 기대와 염원 속에 탁구 여자 복식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상대는
당시 우승 후보 1순위였던 중국의 탁구 스타 자오즈민, 첸징.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담과 긴장감 속에서도 타고난 승부욕과 집중력, 상대를 압도하는 대담함
으로 결국 세계최강 중국을 2:1로 꺾고 영광의 금메달을 따낸 현정화. 대한민국
탁구의 전설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현정화(52세)는 대한민국 탁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살아있는 전설
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우연히 시작하게 된 탁구, 경기에서 패할 때면 분해서 울음
까지 터트렸던 악바리 탁구 신동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17살에 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며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이후 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국가대표 8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 전 종목(단식,
복식, 단체, 혼합복식)을 석권, 대한민국 탁구 선수 최초로 그랜드 슬램 달성, ITTF
(국제탁구연맹)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유일한 한국 선수가 되었다.
한국탁구의 전성기를 이끌며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현정화. 이후 그녀는 스물여섯,
최고의 자리에서 화려하게 은퇴, 96년부터 실업팀 코치, 국가대표 감독 등을 역임
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된다. 그렇게 약 25년이 흐른 지금, 녹색의 테이블 앞,
라켓을 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매섭고 강렬하다. 그녀의 남은 목표는 한 가지.
‘현정화’라는 이름을 잊히게 할 새로운 전설을 탄생시키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계속
되고 있다.
◆ 응답하라! 1991 지바의 기적
" 사실 제가 언니를 주려고 금반지 한 돈 만들었어요
언제 볼 줄 모르니 그걸 보면서 날 기억해 주세요... "
- 현정화 인터뷰 中
1991년은 현정화의 탁구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였다. 91년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
대회,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결성된 남북단일팀. 남한의 현정화, 홍차옥,
북한의 리분희, 유순복 선수로 구성된 ‘코리아’팀은 훈련부터 대회까지 45일 동안
매일 9시 뉴스를 장식할 정도로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당시 여자 단체전
9연패를 노리던 중국과의 마지막 결승전. 3시간 40분의 혈투가 시작됐다. 1, 2 경기
승리 후 3, 4 경기 연이은 패배. 마지막 5경기의 주인공은 북한 유순복 선수였다.
중국의 가오준 선수를 상대로 마지막 세트 역전의 역전을 거듭한 끝에 기적 같은
금메달을 목에 건 ‘코리아’팀.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경기장엔 환희와 눈물, 그리고
그보다 더 뜨거운 무언가가 선수와 관중 모두의 가슴 속에 가득했다. 한 번도
경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현정화가 리분희를 부둥켜안고 오열
했고, 온 국민도 함께 울었다. 7천만, 남과 북이 하나 되었던,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탁구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가장 중심에 있었던 선수, 대한민국 탁구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감동을 전해준 현정화의 탁구 인생을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본다.
◆ ‘그때 그 언니들’, 환상의 복식조 양영자와 재회
"서로가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88 서울 올림픽을 우승할 수 있었어요"
- 탁구선수 양영자와 대화 中
현정화의 탁구 인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운명의 파트너. 바로 양영자(57)
선수다.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최고의 수비 실력과 강력한 드라이브를 모두 갖춘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던 양영자 선수와 빠르고 강한 공격, 영리한 경기 진행이
강점이었던 전진속공형 현정화 선수의 만남은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고 두 사람은
86년 아시안 게임, 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88년 서울 올림픽까지 환상의
복식조라 불리며, 당시 여자 복식 최강자였던 중국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 탁구
역사를 다시 썼다. 하지만 88 서울 올림픽 이후 돌연 은퇴, 남편과 함께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 양영자 선수. 그 후 그녀는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대한체육회 꿈나무
탁구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5살 선배이자 최고의 짝이었던 ‘언니’
양영자 선수 앞에선 깍듯한 후배로 돌아가는 현정화 감독과 대한민국 여자 탁구의
양대 산맥, 양영자 선수, 그 감동의 재회를 <사람이 좋다>가 함께 한다.
◆ 탁구 여제에서 여자로 돌아온 일상
"무뚝뚝했지만 외모도 잘생겼고, 콩깍지가 쓰여
탁구 칠 때 멋있어 보였죠"
"어른들은 뜯어 말리셨죠 큰 일을 해야 되는 사람인데
남자친구가 생겨서 잘못하면 큰 손실이다"
- 현정화 인터뷰 中
뛰어난 실력과 빼어난 미모로 화장품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현정화. 그녀의 러브스토리 역시 화제였다. 탁구 국가대표 동기로
태릉선수촌에서 사랑을 키우며 10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까지 골인한 주인공은 국가
대표 상비군이었던 김석만(53) 선수. 두 사람의 연애에 가장 많은 반대를 한 건
감독들이었다. 한국탁구의 대들보였던 현정화의 경기력에 방해가 될까 극구반대
했던 연애,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998년 결혼
후, 딸 서연(20), 아들 원준(18) 두 아이를 둔 현정화 감독. 2012년 가족과 함께 떠난
어학연수 이후 아이들의 학업을 위해 아빠와 두 아이는 미국에 남게 됐다. 어느덧
대학 1학년,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온 서연(20). 그리고 7년 만에 딸과 함께하게 된
일상. 탁구 선수 현정화가 아닌 엄마 현정화는 어떤 모습일까?
녹색의 테이블 앞에서 그녀는 완벽했다. 냉철한 승부사였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대한민국 탁구의 전설이자 우리 모두의 역사로 남은 그녀. 현정화
감독의 다음 목표는 바로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 낼 감독이 되는 것. 온 국민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현정화 감독이 전해주는 희망의 ‘파이팅’을 <사람이
좋다>에서 담는다.
■ 천재 뮤지션의 탄생! 시티팝의 원조 김현철!
1989년 벼락처럼 등장한 천재로 불리며 등장한 싱어송라이터 김현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인 김현철은 작년부터 시티팝 열풍이 불면서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그는 만 스무 살의 나이에 직접 작곡, 작사한 ‘춘천 가는 기차’를
발표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제2의 유재하’라는 별명을 얻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김현철. 데뷔 31년이 된 가수이자 국가대표 급 DJ로 불리며 MBC
라디오를 진행하는 활약상과 가수 김현철이 인생 최초로 온라인 콘서트에 도전하는
과정이 ‘사람이 좋다’에서 펼쳐진다.
지난 5년 동안 <복면가왕>에 출연하면서 예능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현철은 데뷔
31년을 맞은 우리나라 최고의 뮤지션 중 한 명이다. 그는 1989년 직접 작사·작곡과
제작까지 맡은 <김현철 1집>을 발표하며 등장했다. 1집은 대한민국 100대 명반 중
12위에 오르며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김현철의 음악이 탄생한 마음 속 고향은
서울의 압구정동. 그저 노래가 좋았던 청년은 압구정동에서 운명적인 인연을
만난다. 가수 김현철이 데뷔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도움을 준 뮤지션은 누굴까.
데뷔 뒤의 숨은 이야기와 특별한 인연을 소개한다. 또한 데뷔 초부터 음악을 함께
해온 가수 이현우와 윤상을 만나 김현철의 데뷔시절과 30년 음악세계로 추억여행을
떠나본다. 세 사람이 회상하는 그 시절,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들의 음악. 그리고
서로의 첫 인상까지! 추억이 피어나는 3인방의 단란한 시간이 공개된다. 또한
김현철이 1집을 발표하기 전, 그가 고등학생 밴드로 활동하며 만든 음악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무려 30년 전에 제작된 카세트테이프에서 고등학생 김현철이 부르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노래를 들어볼 수 있다.
"당시에 (김현철은) 신동?
가장 어린데도 불구하고 완성도 있는 음악을 들려준다는 것에 대해서
비교대상이 없어요.”
- 가수 윤상 인터뷰 중에서
"(당시엔) 이런 스타일의 음악은 별로 없었죠.
(김현철이) 굉장히 새로운 장을 연 거지.”
- DJ 배철수 인터뷰 중에서
■ 국가대표 DJ 김현철, MBC ‘브론즈마우스상’을 수상하다
2020년은 DJ 김현철에게 매우 뜻 깊은 한해이다. MBC 라디오를 진행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4년 <밤의 디스크쇼>를 시작으로 <오후의
발견>, <김현철의 골든디스크>까지 청취자의 큰 사랑을 받아왔다. 올해 그는
MBC 라디오를 10년 동안 진행한 DJ에게 주어지는 ‘브론즈마우스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DJ를 맡은 후 단 한 번도 지각해본 적이 없다는 김현철. MBC 라디오국
안에서는 ‘부장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이다. 선배 DJ인 배철수와 만나
라디오의 매력과 음악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특별한 시간을 갖는다.
김현철은 <복면가왕>에서 솔직한 매력과 전문가다운 분석으로 시청자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김성주와 신봉선, 이수지 등 동료 연예인이 열창하는 김현철의 명곡
메들리! 그 화기애애한 현장을 만나 보자.
"그때는 라디오가 TV보다 더 힘이 센 적이 있었어요.
(DJ를 하기 전) 저 혼자 방에 있을 때 노래를 재생하면서
‘다음 노래는 몇 년도에 누가 낸 노래입니다’하고 혼자 따라했죠.”
- 가수 김현철 인터뷰 중에서 -
■ 교통사고와 슬럼프를 극복한
가수 김현철의 인생 최초 온라인 콘서트!
이현우, 윤상, 윤종신과 함께 연예계의 ‘노총각 4인방’으로 불리던 김현철은 2002년
결혼하며 슬하에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자택과 개인
작업실이 공개된다. 따뜻한 봄날, 결혼 19년을 맞이한 김현철 부부의 단란한 일상을
함께 했다.
굴곡 없을 것 같은 김현철의 음악 인생에 두 차례 큰 위기가 존재했다. 1집이
대성공을 거둔 다음 해 그는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교통사고로 이어졌다. 재활을
거쳐서 다시 무대로 돌아오기까지는 2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복귀 후 김현철의
대표곡인 ‘달의 몰락’이 실린 3집 앨범은 약 8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또다시 2006년부터 2019년까지 13년 동안 그는 이유모를 슬럼프를
겪으며 음악작업을 할 수 없었다. 소유한 모든 악기를 팔았고 새로운 곡을 쓸 수
없었다. 가혹한 슬럼프 끝에 지난 해 데뷔 30주년을 맞아 김현철은 10집 앨범을
발표했다. 13년이 세월이 흐른 후, 위기를 극복하고 그가 복귀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코로나19로 인해 극심한 불황이 계속되고 있는 공연예술무대. 김현철은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한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브론즈마우스상’의 수상을 기념하는
콘서트는 시간과 장소의 장벽 없이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팬들을 찾아간다. 데뷔
31년을 맞은 그가 준비한 온라인 콘서트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김현철의 특별한
콘서트 현장과 진솔한 인생 이야기가 공개된다.
"제가 가수 30년, DJ 10년이 됐는데요.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건강 닿는 데까지 계속 하고 싶습니다.”
- 가수 김현철 인터뷰 중에서
■ 화제의 커버 영상으로 리틀 혜은이 등극!
차세대 트로트 스타 요요미
" 굉장히 노래를 잘하고 특색이 있어요.
가요계에 좋은 재목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죠) "
- 진성 int
" 요요미랑 이야기 나누면 시골 공기 좋은 데 가서
평상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공간을 잊을 정도의 매력이 엄청나요.
순수함이 압도적으로 많은 친구인 것 같아요. "
- 정선희 int
간드러진 목소리와 귀여운 외모로 혜성처럼 등장해 전국을 누비는 신인 트로트
가수가 있다. 중년들에게 압도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중통령(중년들의 대통령)’
이라 불리는 가수 요요미! 최근 온라인상에서 레전드 가수 노래를 재해석해 부른
요요미의 커버 영상이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 2018년부터 매달 꾸준히 업로드 해온
커버 영상만 무려 137개! 수많은 커버 영상 중 특히 혜은이의 ‘새벽비’ 커버 영상은
조회 수 약 360만 회를 기록하며 요요미를 포스트 혜은이로 주목받게 했다.
요요미를 라이징 스타로 만들어준 커버 영상은 모두 소속사 사무실에서 탄생한다.
무대 의상과 촬영 장비만 채워도 꽉 찰 정도로 작은 사무실에서 소속사 대표와
요요미 두 사람이 영상을 제작해내는 것. 녹음, 촬영, 편집 등의 모든 과정은 소속사
대표가 도맡고, 요요미는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까지 직접 소화해낸다고.
요요미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작한 커버 영상은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지금은 7080 감성과 젊은 감성을 모두 사로잡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 ‘목소리 일부러 저렇게 내는 건가?’
좋아하시는 분들은 좋아하는 거고 싫어하시는 분들은 싫어하는 이유가 있는 거니까
지금처럼, 저 자신 그대로의 모습 보시면서 즐거워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 요요미 int
데뷔 이후, 요요미는 독특한 목소리 때문에 악성댓글이 생기고 귀여운 척한다는
오해를 산적도 많다. 하지만 이것도 관심이라며 그저 감사하다는 신인가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행복한 요요미는 매일 꿈을 꾸며
행복하게 노래한다.
■ 34년 차 무명 가수 아버지와 꿈을 이뤄가는 신인 가수 딸의 하모니
어린 시절부터 트로트 가수가 꿈이었던 요요미는 왜 그토록 가수를 꿈꿨을까?
요요미는 6살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무대 위 노래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 왔다. 노래할 때만큼은 늘 행복해 보였던 아버지를 보며 요요미는 아빠 같은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아버지는 34년 동안 이렇다 할 히트곡 하나 없는
무명 가수다. 1987년, 아버지는 스무 살에 KBS <신인 가요제>로 화려하게 데뷔
했다. 하지만 가수의 길은 험난했다. 어린 삼 남매와 아내를 위해 자신의 꿈을
좇기보다는 가정을 택해야 했던 지난날.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낮에는 일용직을 전전하고 밤에는 라이브 카페와 밤업소에서 노래하며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본 요요미는 아버지가 일
하는 라이브 카페에서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노래 연습을 하고 밤에는 아버지 일을
도우며 남몰래 가수의 꿈을 키웠다. 가수가 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처음 말했을
때, 아버지는 딸의 꿈을 반대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생
스러운지 알기 때문.
" 제가 (가수하던 중) 2002년도에 전 재산을 잃었어요.
빚을 한 5억 정도 졌었는데 20년 동안 그 빚을 계속 갚아온 거죠.
어떻게든 이겨내야 하니까, 그래야 가족이 있는 거잖아요. 참고 견딘 거죠. ”
- 요요미 아버지 박시원 int
" 라이브 카페에서 낮에 연습하고 소파에 앉아 우는 아빠를 본 적이 있어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커가면서 보니 아빠의 뒷모습에 측은함이 많이 보였어요.
제가 가수 한다고 할 때
‘너 그거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넌 아빠 보고서도 그러냐?’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제 의지가 보이니까 (아버지도) 그때부터 허락해주신 거예요. "
- 요요미 int
가수가 된 요요미에게는 오랜 꿈이 있다. 바로 큰 무대에서 아버지와 가수가 된
자신이 함께 노래하는 것. 아버지의 못다 한 꿈을 그렇게라도 이뤄드리고 싶은
딸이다. 그런 요요미에게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가정의 달을 맞아 아버지와
함께 KBS <불후의 명곡> 경연 무대에 오르게 된 것! 예상치 못한 섭외 소식에
초긴장 상태가 된 아버지와 무대를 상상하며 들뜬 요요미. 그런데 녹음부터 연습
까지 아버지의 실수가 계속되는데. 과연 두 사람은 방송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부녀의 꿈을 향한 무대를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한다.
■ 노래만 할 수 있다면! 행복을 꿈꾸며 매일 성장하는 가수
풍부한 표정 연기와 애교로 사랑받는 가수 요요미. 그녀의 표정은 오랜 시간 쌓아온
내공에서부터 시작된다. 매일 밤 집에서 틈틈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며 백설 공주,
라푼젤 등 좋아하는 캐릭터의 표정을 따라 한다는 요요미.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들이 표정이 다양하고 디테일이 살아있어 도움이 된다고. 요요미는 자신의
이야기와 감성을 노래에 담고 싶어 매일 거울을 보며 연습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시간을 쪼개 노래 연습을 하느라 쉽게 잠드는 법이 없다. 요즘 하루도 쉰 적 없는
그녀는 그래도 노래를 부르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매
순간 즐기며 노래하는 그녀. 무작정 노래가 좋아서 노래만을 위해 살아온 요요미의
바쁜 일상과 엉뚱 발랄한 반전 매력을 공개한다.
" 제가 노래할 때 보니까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가수하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생각해요)
저를 노래하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봐주시는 분들의 표정을 보면 너무 황홀해요 "
- 요요미 int
■ 스페인 출신 모델이 지구 반대편 나라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유
조각 같은 얼굴과 다부진 몸매, 188cm의 훤칠한 키로 이탈리아와 태국, 미국을 거
쳐 한국에서 활동 중인 7년차 모델 장민(30세). 이국적인 외모에 국적은 스페인 이지
만 알고 보면 그의 몸에도 한국인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고 한다.
"저는 고향이라고 하면 스페인도 생각나고 한국도 생각나요
대한민국은 저희 아버지의 나라이자, 저한테는 제 2의 고향이에요”
- 장민 인터뷰 中
스페인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셨던 한국인 아버지와 스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
난 장민. 잘 생긴 외모에 유쾌한 성격으로 늘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 그도 따돌림과
차별 속에 자라온 아픈 기억이 있다는데... 장민이 살았던 스페인의 작은 고향마을에
서 유일한 동양인 혼혈이었던 그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놀림을 받는 등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마음 한쪽으로 한국인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고 한다.
하지만 한국생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
두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 있다는 특별함과 제 2의 고향을 물려준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항상 해주셨던 말이 있어요
‘Tu éxito es tu esfuerzo (네 성공은 너의 노력에 달려있어)’
제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 장민 인터뷰 中
어려서는 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
어 지구 반대편의 나라인 한국 땅을 밟게 된 장민.
‘성공은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아버지의 좌우명대로 노력한 한국 생활이 어느
덧 5년 차.
포토그래퍼의 셔터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화려한 비주얼로
카리스마 뽐내는 화보촬영 현장부터,
방송가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친구들과의 모임,
한국어 완벽 마스터를 위해 초빙한 한국어 선생님 방송인 손미나와의 특별한 수업까
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거의 한국인’ 장민의 이야기!
■ 모델 장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그리고 장민의 두 번째 가족
카페에서 아내(강수연)에게 첫눈에 반해 서툴지만 진심을 담은 한국어 솜씨로 마음
을 전하고 적극적인 구애를 통해 결국 결혼에 골인한 장민.
그런데 알고 보면 아내보다 장인, 장모가 사위인 장민에게 더 마음을 빼앗겼다고 하
는데~
아내와 사귀기로 한 날에는 두 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들고 처가댁에 허락을 받으러
가고, 프러포즈를 한 날에는 곧장 장인어른을 찾아가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릴 만큼 사랑스러운 사윗감으로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민이 눈을 본 순간 그 눈에 내가 먼저 푹 빠져버렸어요.
가족을 대하는 모습,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을 딱 빼앗겼는데, 그 다음에는 수연이를 뺏어갔더라고요.
‘한국에서 우리가 장서방의 진짜 부모가 되어줘야 겠구나’생각했죠”
- 장인어른 인터뷰 中
그리고 장민이 가족이 된 후 집안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처가식구들.
스페인 출신다운 장민의 자연스럽고 잦은 스킨십이 처음에는 퍽이나 부담스러웠다
는 장인, 장모.
하지만 이제 사위를 멘토 삼아 부모님까지 스킨십이 늘어나며 가족 분위기가 달라졌
다는데~
"남편(장민)과 결혼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원래는 되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인데, 항상 저에게 용기를 줘요
그래서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나도 잘 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해줘요.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그 진심이 많이 느껴졌어요”
- 아내 인터뷰 中
현재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결혼식이 미뤄지면서
아내와 혼인신고만 한 채 신혼을 즐기고 있지만,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처가식구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흥겨운 가족파티
의 현장까지.
스페인 남자 장민의 한국 결혼생활 적응기 대공개!
■ 어린 나이에 짊어져야 했던 가장의 무게
1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은 지금도 장민의 마음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심장 수술을 받는 도중 돌아가셨다는 장민의 아버지.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가족들이 걱정할까~ "금방 다녀올게”라고 얘기하면서도
혹시 모를 만일을 위해 "민이야, (엄마와 누나를) 잘 책임져 줘”라는 말을 남기고 떠
난 아버지.
그리고 그날 이후 장민은 19세의 나이에 조금은 일찍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족과의 시간, 추억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강한 책임감을 보고 자란 장민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가장으로서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고 싶었던 대학과 소방관이 되고 팠던 꿈도 포기한 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전기회사, 옷 가게 판매직, 보험영업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고...
그러던 차 우연히 모델 제의를 받게 되었고 태국, 미국,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그는
기왕이면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자리 잡고 싶은 마음에 무일푼으로 한국 땅을 밟았
다.
"한국말을 할 수 있게 된 후로 가끔씩 상상해요.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랑 한국어로 대화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장민 인터뷰 中
아버지의 문화, 마음을 이해하게 된 지금
돌아가신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자 매일 노력하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족을 챙기기 위해
스페인을 떠난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와 통화하며 안부를 챙기고 있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면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꼭 어머니를 모시고 와
함께 살고 싶다는 효자 장민의 모습을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 보자.
█ 미국 시카고 대학 출신 엘리트, ‘대한미국인’이 되다!
"타일러 별명이 ‘대한미국인’이잖아요
미국 사람인데 한국 문화를 너무 잘 알아요."
-개그맨 김영철 인터뷰中
세계 10대 대학 중 하나이자 8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미국 최고의 명문대
시카고 대학 국제학부 졸업. 한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8개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 천재. 역사, 문화, 사회 등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
이 화려한 스펙의 주인공은 바로 ‘아이큐 165의 뇌섹남’ 방송인 타일러 라쉬(33세).
그가 한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카고 대학 국제학 전공 시절, 타일러의 관심을 끌었던 건 ‘북한’. 북한에 관한
관심이 한국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마침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일하게 된 것이 한국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대학 졸업 후 보장된
미래 대신 한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한 타일러. 어려울수록 쾌감을 느낀다는
타일러에게 ‘한국어’는 학구열을 불타오르게 하는 도전의 영역이었다. 대부분의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선택하는 어학원 대신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를 선택한 타일러. 외국인 대상의 언어 교육이 아닌, 일반 사회과학
대학원에서 한국어와 외교학을 동시에 배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 생활은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열어주었다. 가난한 대학원생 시절,
버스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방송 출연 아르바이트가 바로 <비정상회담>
이었다. 한국 사람도 놀라게 만드는 촌철살인 한국어와 정치, 역사, 문화를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에 시청자는 감탄했고, 그렇게 ‘대한미국인’ 타일러가 탄생
했다. 예능뿐만 아니라 토크쇼, 강연 프로그램 등 각종 방송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는
타일러 라쉬! 그에게 올해는 특히 의미가 깊다. 한국에 온 지 어느덧 10년. 스물셋,
앳된 대학생으로 한국을 찾았던 타일러는 이제 서른셋, 청춘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 반전 매력 가득, ‘뇌섹남’ 타일러 라쉬의 싱글 라이프 공개
"살고 싶은 공간을 직접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인테리어를 싹 다 바꿔버렸어요."
-타일러 라쉬 인터뷰 中
커피 한 잔 들고 걷기만 해도 뉴욕을 떠오르게 하는 타일러!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올 것 같은, 레트로 감성 가득한
현관문부터 미국 고향 집을 그리워하며 직접 꾸민 주방까지 방송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타일러의 개성 만점, 싱글 하우스. 사람에게 집은 충전과 휴식의 공간,
타일러에겐 그리움을 달래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테리어 하나하나 정성 들여
직접 했을 정도로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타일러의 스위트홈이 공개된다.
캔버스와 물감 하나만 있으면 멋진 작품이 탄생하는 의외의 그림 실력! <비정상
회담>에서 만나 인생 친구가 된 블레어와 함께 페인팅 인터넷 방송까지 시작했을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타일러. 언어뿐만 아니라 미적 감각까지도
타고난 재능 부자였던 것. 그의 반전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가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곳은 작은 텃밭이 있는 옥상 테라스와 중국 분위기 물씬 나는 대림
시장, 그리고 젖소를 만날 수 있는 교외의 목장이라는 사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타일러의 매력 넘치는 반전 일상을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보자.
█ 타일러 라쉬가 전하는 소신 발언, About ‘코로나19’
"돌아와도 돼... 그냥 돌아오면 안 되니?”
-친구 알베르토와 대화 中
"돈 많은 사람이 안 해주고 싶다는 거예요.
말도 안 돼요. 사람이 죽어가는데"
-친구 알베르토와 대화 中
평소 한국의 정치 상황과 외교 문제에 대해 솔직하고 논리적인 의견을 내놓으며
이슈가 되었던 타일러. 얼마 전 외교부 공식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에서 타일러는
한국의 코로나 19 대응 상황을 차분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출연 중인 프로그램에서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19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표현, 관심을 모았는데..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상황, 그의
가족이 사는 미국 역시 하루가 다르게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어 타일러의 걱정 역시
커지고 있다. 한국살이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형, 동생으로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알베르토 몬디와의 만남에서도 화두는 ‘코로나19’. 이 두 사람이 전해주는
각국의 생생한 코로나19 상황, 그리고 심각해진 미국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타일러, 그 이유는 무엇일까? 뉴욕 인근 지역에 사는
어머니와 수시로 영상 통화를 하며 안부를 확인하고 있는 타일러. 어머니와의 통화
도중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한국 생활 10년 차. 방송도 일상도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도, 어느 것 하나 대충
대충이 없는 삶의 열정 뜨거운 사람, 타일러 라쉬. 한국의 오늘을 누구보다 치열
하게 살아가고 있는 ‘대한미국인’, 타일러 라쉬의 일상을 <사람이 좋다>에서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