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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장실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장면 총리(김무생)의 측근들은 장면 총리가 서명만 해주면 즉시 군을 움직여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는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 의 서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한사장을 다그쳐 장면에게 보낸다. 갈멜수녀원에 은신해 있는 장면 총리를 찾아온 한사장은 육군에 군부 쿠데타를 진압 하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촉구하지만 장면은 거부한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9시 육사생도들은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하고 육사교 장 강영훈 중장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김동현)을 찾아와 이것은 쿠데타의 가타부타 를 떠나서 군 전체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라며 말려야겠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이진수)의 부하들이 강영훈 중장에게 총을 겨누며 나가지 못하게 한 다. 같은날 오후 12시 30분경 은신처에서 나온 장면은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내각의 해산 을 결정함으로써 1960년 8월 23일 출범 이후 270일만에 장면 내각은 붕괴된다. 이후 정당 및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제2공화국은 붕괴된다. 사회가 안정이 되면 정권을 정당하게 넘기고 군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겠다고 약속 한 쿠데타 세력은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기나긴 군정이 시작된다.
제2공화국 40-2회 1990-04-29MORE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30분 쿠데타 세력인 해병대 제1여단과 진압군 헌병의 교전 은 30분만에 끝나고 쿠데타 세력은 방송국과 육본 등 주요 시설을 장악한다. 쿠데타 세력은 장면 총리(김무생)의 집무실 겸 숙소인 반도호텔 808호실로 쳐들어가 지만 이미 장면 총리는 몸을 피한 후이다. 중앙방송국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은 새벽 4시 35분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신들의 쿠 데타가 국가를 위한 혁명이라고 말한다. 육본을 장악한 박정희(이진수)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김동현)에게 쿠데타를 지지 해 줄것을 요청하고 장도영은 해군과 공군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과 함께 대책을 논의한다. 박정희는 첫 사업으로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용공분자 검거령을 내려 닥치는대 로 잡아들이고 윤보선 대통령(이순재)을 찾아가 경위를 설명한다. 더불어 총리가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계엄령을 추인해 줄것을 요구한다. 매그루더 장군과 그린 대리대사는 변칙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군을 출동시킬 것을 촉구하지만 국군내의 유혈사태를 우려한 윤보선 대 통령은 통수권을 거부한다. 박정희는 부하 장교들을 시켜 다시 삼군 참모총장을 협박하고 1961년 5월 16일 오후 4시 30분 장도영은 결국 군사혁명위원회의장 및 계엄사령관을 수락함으로써 혁명을 지지한다. 육군의 막강전력을 휘하에 두고 있는 이한림 제 1군사령관은 박정희를 반란자로 몰 며 진압책을 강구한다. 더불어 미군은 8군사령부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다소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윤보 선 대통령에게 유혈사태 없이 일을 마무리 하자는 내용의 친서를 각 야전군 지휘관 들에게 보낼것을 부탁한다. 이한림 1군사령과는 여기에 반발하지만 1군사령부내 쿠데타 동조세력에게 축출당하 고 박정희는 가장 껄끄러운 상황을 넘긴다. 한편 갈멜수녀원에 은신중인 장면 총리에게 그의 측근인 경향신문 사장이 찾아온다. 경향신문 사장실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장면 총리(김무생)의 측근들은 장면 총리가 서명만 해주면 즉시 군을 움직여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는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 의 서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한사장을 다그쳐 장면에게 보낸다. 갈멜수녀원에 은신해 있는 장면 총리를 찾아온 한사장은 육군에 군부 쿠데타를 진압 하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촉구하지만 장면은 거부한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9시 육사생도들은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하고 육사교 장 강영훈 중장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김동현)을 찾아와 이것은 쿠데타의 가타부타 를 떠나서 군 전체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라며 말려야 겠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이진수)의 부하들이 강영훈 중장에게 총을 겨누며 나가지 못하게 한 다. 같은날 오후 12시 30분경 은신처에서 나온 장면은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내각의 해산 을 결정함으로써 1960년 8월 23일 출범 이후 270일만에 장면 내각은 붕괴된다. 이후 정당 및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제2공화국은 붕괴된다. 사회가 안정이 되면 정권을 정당하게 넘기고 군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겠다고 약속 한 쿠데타 세력은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기나긴 군정이 시작된다.
제2공화국 40-1회 1990-04-29MORE
쿠데타를 앞둔 1961년 5월 초순 박정희 소장(이진수)은 자신의 고향 마을을 찾아가 부모님의 묘소에 절을 올리고 죽마고우 이준상에게 식구들을 부탁한다. 같은 시기 1961년 5월 5일 전구구 19개 대학, 1개 고등학교의 대표로 이루어진 민족 통일 전국학생연맹 준비위원회는 집회를 열고 남북 학생회담을 제의한다. 이에 정권을 잡고 있는 민주당은 학생들을 규탄하고 신민당은 지지와 규탄으로 의견 이 분열된다. 혁신계인 통일사회당과 사회당은 즉시 학생들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정계의 국론이 분열되고 학생들 또한 지지와 규탄으로 나뉘어 사회 전체의 국론이 분열될 조짐을 보인다. 1961년 5월 15일 저녁 쿠데타 세력은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30사단에서 쿠데타 계획 이 발각되는 바람에 혼란에 빠진다. 쿠데타의 음모가 있다는 긴급한 보고를 받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김동현)은 방첩대 로 들어가 각 부대에 작전봉쇄명령을 하달하고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하고 상황은 점점 쿠데타 세력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이에 박정희는 유혈도 불사하는 2차 작전을 지시하고 직접 6관구사령부로 들어가 작 전을 지휘한다. 박정희에게 전화를 건 장도영은 체포령은 내리지 않고 박정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는 말만 반복하고 장도영이 자신쪽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예감한 박정희는 공수특전 여단, 해병대 제1여단, 33사단 등 자신에게 동조하는 부대들을 동원, 한강 이남선까 지 진격한다.
제2공화국 39회 1990-04-22MORE
1961년 3월 22일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등 혁 신계는 대규모 횃불시위를 열어 장면 정권의 타도를 외친다. 시위의 내용과 목적에 위기감을 느낀 여야는 1961년 3월 23일 청와대에서 요인들이 모여 회담을 갖지만 서로의 잘못만 탓하며 정쟁으로 옮아간다. 윤보선 대통령(이순재), 장면 총리(김무생), 곽상훈 민의원 의장(김길호),백낙준 참 의원 의장, 김도연 신민당 의원(김인태), 유진산 신민당 의원(심양홍), 현석호 국방 장관(변희봉), 양일동 신민당 의원, 조한백 의원이 참여한 이른바 청와대 요인회담 은 철저히 비밀에 붙이기로 했으나 기자의 유도심문에 걸린 백낙준 참의원 의장이 모든 것을 말하는 바람에 들어나게 된다. 사실을 알게된 민주당의 이석기 원내총무는 윤보선 대통령이 내정에 지나친 간섭을 한다며 규탄하고 양일동 신민당 원내총무는 그런 민주당을 비난함으로써 여야의 갈 등은 더욱 깊어진다.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 박정희 소장(이진수)은 김종필(이정길)과 만나 군사혁명 계 획서를 검토하는 한편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김동현)을 찾아가 계엄령 시행 계획서 를 제출한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의 음모를 감지하고 장도영 총장을 불러 이야기하지만 장도영은 사실을 부인하다. 박정희의 집에 모인 쿠데타 세력은 지난번 정했던 4월 19일의 쿠데타를 위해 은밀한 논의에 들어간다. 1961년 4월 19일 4월혁명 1주년 기념일을 맞아 정부와 군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우려해 비상체제에 들어가지만 학생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정부는 안도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평화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된 박정희는 4.19 쿠데타가 실패했 음을 알게된다.
제2공화국 38회 1990-04-15MORE
민주당 소장파들이 중심이된 신풍회 소속의 함종빈 의원(임영규)은 기자회견을 열 어 동경식품과 대한중석의 합작 체결 과정에서 오위영 무임소 장관이 100만불의 커 미션을 챙겼다고 폭로한다. 이것이 이른바 중석불 사건으로 이같은 내용의 기사를 접한 오위영은 크게 화가나 함종빈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함종빈은 일을 벌여놓고 고민에 빠진다. 노장파 의원들고 장관들, 청풍회의 대표 이철승과 파문의 근원 함종빈 의원을 부른 장면 총리(김무생)는 함종빈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이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크게 꾸짖고 노장파 장관들은 모두 청풍회의 탓이라며 이철승을 공격한다. 이에 이철승은 자신이 알고있는 노장파의 비리들이 많다며 계속 공격한다면 자신도 하나씩 터뜨리겠다고 말해 이번 사건은 민주당 노장파와 청풍회의 갈등으로 비화된 다. 이번 사건이 정국 주도권을 잡을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신민당은 자체 조사위원회 를 구성하여 철저한 조사에 들어간다. 결국 이 문제로 국회는 공전에 빠지고 여기에 반공임시특별 법안과 데모규제법안의 제정문제가 더해지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지고 장면 정부를 비난하는 여론과 학생 시 위가 들끓는다. 한편 쿠데타를 준비하는 박정희 소장(이진수)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부산일보 주 필 황용주를 만나 자금을 요청하는 한편 2군 참모장 이주일 소장(신충식), 김종필(이 정길), 강상욱 중령을 만나 그동안 포섭한 장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포섭장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육사 8기생인 김종필이 강상욱 이 포섭한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자 강상욱 역시 육사 8기생중 일부를 비판하는 바람에 육사 8기생과 강상욱의 갈등이 깊어진다. 5.16 쿠데타 후 강상욱은 결국 김종필에 의해 제거된다. 쿠데타에 참여하게된 김윤근 해병여단장(임현식)은 다시 자신을 찾아와 쿠데타를 종 용하는 부하들에게 이미 김동하(백일섭)와 박정희가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밝힌다.
제2공화국 37회 1990-04-08MORE
1961년 2월 8일 정일형 외무장관(김용건)과 메카나기 주한 미국대사 사이에 한미경 제협정이 체결된다. 하지만 이 협정은 미국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굴욕적인 협정으로 세간의 많은 비판 을 받는다. 특히 학생들의 시위가 심했는데 학생들은 서울대 총학생회에 전국학생 한미경제원 조협정 반대투쟁위원회, 소위 전국학생 반대투위를 만들고 1961년 2월 14일 오후 1 시 파고다공원에서 한미경제협정 반대 궐기대회를 연다. 하지만 이같은 학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은 경제협정에 내정간섭의 의 도는 전혀 없다는 해석각서를 첨부하여 내용 수정을 거치지 않은채 2월 28일 국회에 서 한미경제협정을 비준한다. 1961년 2월 21일 민주당 구파들이 신파에 반기를 들고 당을 나와 만들기 시작했던 신 민당이 마침내 창당되고 원내 제 1야당으로서 활동에 들어간다. 무능한 정부에 실망한 학생들은 메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서울대 졸업식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박사학위를 받는 메카나기를 야유하며 졸업식장 에서 나와버린다. 한편 쿠데타를 준비하는 박정희 소장(이진수)은 김포 해병여단장으로 부임한 김윤 근 준장(임현식)을 포섭한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으로서 박정희의 직속 후배인 김윤근은 쿠데타 동조에 대해 고민 하던중 오정근 중령, 조남철 중령, 최용관 소령 등 부하 장교들이 찾아와 쿠데타 계 획을 말하는 바람에 동조를 결심한다.
제2공화국 36회 1990-04-01MORE
김영삼(길용우), 박준규, 김용성 등 신민당 12명과 서태원. 전유상 등 민정구락부와 무소속 7명의 젊은 국회의원들은 바르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청조회를 결성 하고 모범을 보인다. 이에 새생활 운동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여당과 정부도 그에 앞장선다. 현석호 당시 국방장관(변희봉)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최경록 중장의 경질은 현석호와 장면 총리(김무생) 둘간의 간단한 합의로 이루어졌다고 되 어 있으나 실제로는 더 복잡한 사정이 있어보인다. 장도영 2군사령관(김동현)의 많은 도움을 받은 박정희 2군 부사령관(이진수)은 민주 당측 인사들과 잘 아는 김대춘 대령을 시켜 장도영에 대한 인사 청탁을 하도록 지시 한다. 현석호 국방장관은 미 8군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을 찾아가 신임 육군참모총장에 누 가 좋을 것인지를 의논하고 쉽게 장도영을 내정한다. 다음 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도영에 대한 격론이 벌어지지만 결국 장도영을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결의하고 국회의 동의를 거쳐 그를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한다. 한편 박정희와 쿠데타 음모 세력인 육사 8기생들을 감시하는 군부는 16인 하극상사 건의 재심문을 빌미로 김종필(이정길) 등 육사 8기생의 핵심 3명을 헌병대로 압송하 고 결국 김종필은 강제 예편당하게 된다. 또한 군부는 박정희와 그의 아내인 육영수(고은아)를 감시하고 이 사실을 아는 박정 희는 이 정권에 대해 더욱 불신하게 된다.
제2공화국 35회 1990-03-25MORE
4.19혁명의 1960년이 가고 1961년 새해가 밝아온다. 기자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다과 회를 연 윤보선 대통령(이순재)은 각 정당의 정쟁 자제와 일치단결로 난국을 타개해 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장면 총리(김무생)는 실질 적인 거부의사를 밝힌다. 이로써 정국안정의 전망은 어두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향후 정국에 대해 걱정한다. 신파와 구파의 대립이 구파의 신민당 창당으로 일단락된 민주당은 새로이 노장파와 소장파 대립구도로 바뀐다. 구파의 신민당 창당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던 민주당 소장파 동지회 의원들은 그렇게 되면 구파로서 입각했던 국방, 부흥, 보사, 체신, 무임소 등 5부장관 들을 해임하는 개각을 단행할 것이 확실하니 이번에 소장파에서 입각을 꼭 해야한다 고 의견을 모은다. 민주당 소장파 동지회는 이같은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고 장면 총리를 비롯한 노장파 는 대책을 논의한다. 오위영 의원은 소장파의 기자회견 내용을 듣고 그들을 지지하지만 장면 총리와의 면 담 후 태도가 돌변, 화를 내는 소장파 의원들에게 정국안정을 위한 협조를 부탁한다. 자신과 가깝게 지내던 소장파의 김재순 의원을 부른 장면 총리는 그를 비롯한 몇몇 소장파 의원들에게 차관 이상의 자리를 내놓으며 협상을 하고 구파로서 입각했던 5 부장관들은 은밀히 모여 대책을 논의한다. 일본을 다녀온 소장파의 대표 이철승 의원은 28명의 소장동지회 해체파가 소장동지 회 해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소장동지회 해체파는 소장파를 떠나고 결국 소장파는 해체되고 만다. 하지만 이철승은 20여명의 소장동지회 고수파와 구파의 신민당 창당으로 민주당 분 열시 그들을 따라가지 않은 합작파 10여명을 모아 신풍회를 결성한다. 1961년 1월 30일 장면은 소장파가 포함된 3차 개각을 단행하고 이때 현석호(변희봉) 와 오위영이 다시 입각한다. 한편 예편의 위기에서 벗어나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있는 박정희는 구체적인 쿠데타 계획에 들어간다.
제2공화국 34회 1990-03-18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