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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서울 시청 시장실 안의 '젓갈통 의자' 그 의자의 주인, 노량진 수산시장 '젓갈 할머니' 유양선 시민들의 삶을 위한 다양한 의사결정과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시장실 그 시장실 안에 뜻 깊은 사연을 담은 시민들의 의자가 여럿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단연 눈길을 끄는 특이한 모양의 의자 '젓갈통 의자' 바로 유양선 할머니께서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줄곧 사용해 오신 것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 ‘젓갈통 의자’를 벗 삼아 열심히 일해 번 '짠내'나는 돈으로 지금껏 장학금과 책을 기부해 온 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무려 23억여 원! 연일 추운 날씨에 몸은 물론 마음까지 움츠러들기 쉬운 연말연시 우리들 마음 한구석을 녹여줄 유양선 할머니의 따뜻한 인생 스토리를 <덤벼라! 인생>에서 만나보자! ▶나누고 베푸는 삶, '책 할머니' 유양선 할머니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 해 온 몸이 쇠약해진 상태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노랑아가씨'. '책 할머니'로 통하는 유양선 할머니 시장 상인들 뿐 아니라 손님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장학사업과 여러 이웃들에게 책을 보내는 일에 쏟으며 늘 같은 곳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젓갈을 팔아 오신 할머니를 찾아가 보았지만 그 곳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만나볼 수 없었다 예전부터 편찮으신 몸을 이끌고 무리하여 장사를 해 오신 까닭에 척추 뼈가 깨지고 척추자체가 휘어서 거동이 힘든 할머니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며 회복하고 있는 중인데 ▶'못 배운 게 평생의 한' 그리고 '아이 못 낳은 죄' '여자애가 배워서 뭐에 써!' 아버지의 반대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할머니 영리하고 공부에 욕심도 많았던 할머니는 아버지 몰래 학교에 다녔고 무덤가에 숨어 책을 읽을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러나 책보를 거름통에 빠뜨려가며 할머니의 공부를 말렸던 아버지의 고집을 끝내 꺾을 수 없었다 집안일만 돌보다 뒤늦게 한 결혼, 그러나 그 결혼생활 마저 행복하지 못했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남편과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과 학대를 받으며 그 설움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홀로 살아가기 위해선 강해져야 했고 악착같아져야만 했다 그리고 막상 힘들게 번 돈이 차곡차곡 모이자 아이가 없었던 할머니의 눈길은 자연스레 주변의 아이들, 학생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본인처럼 '못 배워 생긴 한'을 가진 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할머니는 어렵고 힘든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모두 다 자신의 아들 딸 같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기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 ▶할머니가 통 큰 기부를 할 수 있었던 비결 남을 위해선 두 번 고민도 않고 통 크게 기부하시는 할머니 할머니의 기부 비결은 바로 근검절약! 할머니의 별명은 노랑이, 구두쇠 그녀가 티끌모아 태산으로 거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사연은? ▶할머니의 도움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사람들이 할머니께 보내온 깜짝 선물 그리고 그들에게 할머니가 바라는 것 정성껏 써서 할머니 앞으로 보내 온 수만 여 통의 편지가 책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보내온 아이들의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할머니를 찾아와 안부를 묻는 것이 할머니가 보내 준 새우젓으로 담근 김치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 할머니가 지치지 않고 계속 기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진정한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죽을 때까지 건강해서 봉사하고 가는 거 그거야" -유양선 할머니 인터뷰 중- 나누고 베푸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따뜻한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되새긴다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12회 2012-12-31MORE
대구의 한 재래시장. 달콤한 내음으로 가득한 찐빵집에 ‘빵순이’ 순자가 떴다! 100% 수작업! 전국으로 팔려나가는 그녀의 찐빵은 반죽부터 배달까지 그녀의 손을 거쳐 가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 그녀가 찐빵을 만난 지도 올해로 16년 째! 밝은 성격과 기가 막힌 찐빵 맛으로 시장 내에서도 유명인사인 순자씨 현재 연매출 6억 원의 찐빵집 사장이 되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찐빵을 빚어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눈물과 좌절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던 파란만장한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만나보자 ▶ 평범한 주부에서 대박 찐빵가게의 사장이 되기까지 눈물과 좌절의 시간들! 1994년, 그녀의 나이 서른 서른일곱 뜻하지 않게 찾아온 불행 순자씨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순자씨 그러나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남편의 죽음과 동시에 집과 재산을 모두 압류 당하고 이곳저곳에서 출처 모를 빚들만 떠안게 되는데 하루아침에 두 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녀 하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살기위해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했다 그녀는 그렇게 시장으로 발길을 향하는데..! 만두집 종업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시장에서 한 칸짜리 칼국수 점포를 열어 장사를 시작했지만 생각처럼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시장 안에서 살아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찐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제가 살아온 인생과정하고 똑같습니다” - 마순자 인터뷰 중 그러던 어느 날.. 한 제과점에서 찐빵이 불티나게 팔리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자..! IMF시절 값싸고 맛좋은 찐빵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 순자는 찐빵을 만들어 팔기로 결심 하는데.. ▶ 찐빵 하나로 연매출 6억! 대구 명물 찐빵가게 대구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그녀의 찐빵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몰려드는 상인들 300원 짜리 찐빵으로 연매출 6억 원! 100% 수작업으로 하루 5천 여 개를 생산하는 그녀의 하루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순자씨만의 반죽 비법으로 탄생된 찐빵 맛은 다른 어떤 찐빵에 견주어도 단연 으뜸이라는데 작은 찐빵 하나로 대박 성공을 이루기까지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지금 찐빵과 함께 하는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는 순자씨. "시장에서 제 별명이 빵순이 인데요 평생 빵순이로 불려지고 싶어요" - 마순자 인터뷰 중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인생의 전성시대를 맞은 순자씨 오늘도 그녀의 찐빵을 기다리고 있을 손님들을 위해 분주한 새벽을 맞는 그녀의 일상 속으로 따라가보자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11회 2012-12-24MORE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겠다.” 어렸을 때부터 배고픈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싶었던 사람. 가족들에게 버려지고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손을 잡아준 마지막 안식처. 노춘과 선한이웃의 가슴 찡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 좌충우돌 ‘선한 이웃’ 식구들과 노춘 충남 아산시 도고면, 그곳엔 갈 곳 없고 버려진 사람들의 천국, 선한 이웃이 있다. 26명의 장애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곳의 주인장은 바로 노춘. 오늘도 크고 작은 소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애지중지 아끼는 파란 점퍼가 없어졌다고 생떼를 부리는 이태. 샴푸가 떨어졌다고 다짜고짜 친누나한테 전화를 걸어달라는 상보 씨. 대뜸 통장에 있는 돈으로 통닭을 사달라는 김금동 할아버지. 각자의 불평, 불만을 모두 들어주고 있노라면 귀찮을 법도 한데 쓴 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말벗이 되어주는 노춘 원장. ▶ 열흘 만에 먹었던 ‘밥 한 그릇’ 초등학교 졸업 후,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상경한 노춘은 재래시장을 돌며 좀약과 고무장갑을 팔다 그만 사기를 당하게 된다. 장사해 번 돈을 모두 날리고 속상한 마음에 열흘간 식음을 전폐한 노춘. 그때 함께 장사를 하던 형이 다 죽어가는 노춘을 이끌고 밥집으로 향했다. "야! 춘이야 너 이러다 큰일 나, 하면서 남대문 시장으로 가서 형이 밥을 한 그릇 사주는데 그 밥을 먹고 나니까 힘이 생기고... 밥 한 끼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것도 아니지만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용기도 줄 수 있다는 걸 느끼고... 그때부터 저는 부 족하지만 이렇게 섬겼죠. 사람들을....” -노춘 인터뷰 中- 밥을 사줬던 형의 은혜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는 노춘. 그때부터 거리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 노춘의 영원한 지지자, 아내 한때 돼지 500마리가 넘는 돈사를 운영했던 노춘. 하지만 전염병이 돌아 반 이상을 매몰처분하고 그의 인생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이후 칠판장사 외판원을 하며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는 돌연 조립식 건축 사업을 하겠다고 이직을 결심한다. 그러나 초반에 번창했던 사업은 제때 수금이 되지 않아 부도를 맞게 되고 이 일로 노춘은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아내가 쓰러졌다. "교도소에서 나와 가지고... 저 때문에 뇌경색으로 쓰러졌거든요. 제가... 너무 죄송스러웠고 그래서 붙들고 울었어요. 울면서 여보, 내가 잘못했다고..." -노춘 인터뷰 中-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남편을 늘 이해하고 인정해주었던 아내. 그는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아내를 15년 동안 변함없이 보살펴 주었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한테) 나는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하고 살 거라고 그랬어요. 같은 마음을 가졌으니까 협력해서 좋은 일 하자고 하더라고요. 장애인 사역하면서 도 새 식구가 오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렇게 저한테 집사람이 용기를 줬어 요.” -노춘 인터뷰 中- 그리고 ‘환한 웃음’이라는 이름으로 장애인 복지 시설을 시작하게 된다. 그곳에서 노춘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형집행정지자들을 함께 모셨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중병으로 인해 형집행정지가 되었지만 가족들이 데려가길 거부해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지금까지 15년 간, 노춘은 그들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왔다. ▶ 노춘이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 "아빠도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돈을 벌어서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 아니냐고, 꼭 이런 방법이어야 하냐고...” "아빠가 생각하는 나눔이라는 것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 중에 하나를 나누는 게 진정한 나눔이 아니겠냐고 하시더라고요.” -노혜연, 큰 딸 인터뷰 中- 노춘은 병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해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2년 후, 또 다시 간의 60%를 떼어주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를 나누는 것.’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왜, 라는 질문이 통하지 않는 삶. 합리적인 답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생. 그저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에게 인생의 마지막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었던 사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귀 기울여 들어 봐야 할, 노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10회 2012-12-17MORE
양팔 절단된 남자, 무에타이 지도자로 우뚝 서다! - 세계 최초 K-1 여성 파이터 ‘임수정’을 키운 이기섭 관장 감전사고로 절단된 두 팔 … 화마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20대를 지나 무에타이 6단의 격투기 지도자이자, 세계 최초의 K-1 여성파이터 임수정의 스승이 되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는 남자, 이기섭의 파란만장 인생이 펼쳐진다! ▶ 건축사를 꿈꾸던 스물 하나 청년, '양팔을 절단하다'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건축설계사의 꿈을 키워나가던 대학생 이기섭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감전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마취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 때문에 한 달여의 시간동안 매일같이 마취 없이 생살을 잘라내고 소독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팔을 절단하게 되고, 하루아침에 양팔 없는 1급 장애인이 되고 만다. 스물 하나. 꿈도, 희망도 사라진 그는 다니던 대학도 포기하고, 두 차례의 자살 시도까지 하고 마는데... 삶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의미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친척의 도움으로 당구장을 개업, 장애를 딛고 새 삶을 시작할 기회가 생긴다. 그의 성실함과 언제나 긍정적인 모습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몸이 불편한 그를 위해 틈날 때마다 일을 도와주는 손님들도 늘어가면서 그에게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구장에 화재가 발생, 더 이상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양팔 없는 격투기 스승, 세계 최초의 K-1 여성 파이터 키워내다! 성치 않은 몸 하나 남은 그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 윤한채 씨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온 이기섭. 그날부터 윤한채 씨가 운영하던 체육관을 둥지삼아 생활하던 그에게 눈에 띈 것은 무에타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무에타이는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하루에 500번 1000번 ... 발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샌드백을 치고 연습 하고나니 ‘아 이렇게 차야 느낌이 오는구나’ 감이 오더라고요” - 이기섭 관장 인터뷰 中 희망도 꿈도 없던 그에게 무에타이는 삶의 의미가 되었다. 결국 가족과 친구들의 우려를 뛰어넘어 관장의 자리까지 오르는데! 처음엔 그의 장애에 꺼려하던 이들도 조금씩 그의 의지와 능력 앞에 그를 인정하게 되고, 결국, K-1 임수정 선수를 비롯, 훌륭한 선수들의 스승이 된 이기섭 관장! 제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제자들에게 운동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자 지표가 되고 있다는데.. 두 팔 없이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한 이기섭! 그의 180도 뒤바뀐 인생이 펼쳐진다. ▶ "긍정의 힘" 인생 챔피언 이기섭의 끝나지 않은 도전! "저 친구가 저에게 뺏어간 게 하나 있고 준 게 하나 있어요. 뺏어간 건 포기란 단어이고, 준 건 바로 자신감이에요.” - 친구 인터뷰 中 두 팔이 없어도, 그의 생활에 ‘되지 않는 일’이란 없다. 양팔이 없어도 무에타이 6단의 무예고수가 된 그에게 장애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밑거름일 뿐이다. 손대신 발로 가위질을 하고, 마우스를 움직인다. 발로 큐걸이를 만들어 당구를 치고, 의수를 이용해 선수들의 운동을 지도한다. 급기야 최근엔 오랜 숙원이었던 운전면허를 취득했다는데! 아찔한 인생역경을 긍정으로 이겨낸 그의 솔직하고 진심어린 인생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9회 2012-12-10MORE
어두운 바닷가 홀로 나는 새야~ 갈 곳을 잃었나 하얀 바다새야~ 1986년 강변가요제 동상 수상! 각종 음악 차트를 석권하며 승승장구하던 바다새의 유일한 홍일점 김혜정 씨. 그녀가 이제는 바다새가 아닌 자신의 이름 ‘김혜정’으로 26년 만에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오며 혜정 씨가 겪었던 곡절 많은 인생살이! 첫째 아들의 자폐성 발달장애 판정과 두 번의 화마로 가족의 추억과 전 재산을 모두 날렸지만 가족을 위해 그리고 꿈을 위해 무대에 오르는 바다새 김혜정의 힘찬 날갯짓을 지켜보자. ▶ ‘바다새’ 너는 내 운명! 어릴 때부터 조용필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며 ‘조용순’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소녀 김혜정. 대학에 입학해서도 혜정 씨는 노래 잘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는 운명처럼 ‘바다새’라는 곡을 만났고 1986년 강변가요제에 출전하여 동상을 수상! 1집 앨범까지 발매하며 ‘바다새’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멤버의 갑작스런 군 입대로 2년 만에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하지만 혜정 씨는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솔로 데뷔를 준비하던 혜정 씨는 잇따른 사기와 배신에 결국 가수의 꿈을 포기하게 되는데... 2012년, 혜정 씨는 그 옛날, 바다새처럼 다시 비상하기 위해 날갯짓을 시작했다! ▶ 어제의 고통이 내일의 고통은 될 수 없다! 결혼 후 행복한 나날을 보낸 그녀에게 커다란 시련이 연이어 닥쳤다. 첫 번째 시련은 바로 큰 아들의 자폐성 발달장애 판정. 그저 남보다 말이 조금 늦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던 큰 아들 준영이에게 청천벽력 같은 판정이 내려지고 말았다. 자신의 팔을 물어뜯고, 벽에 머리를 박는 등 감당할 수 없는 준영이의 행동에 혜정 씨는 끝없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우울증까지 겪게 되는데... . "준영이 데리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릴까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잠을 잘 땐,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 한 적도 많고요.” -김혜정 인터뷰 중 곧이어 이어진 두 번째 시련. 2006년. 준영이의 불장난이 커다란 사고를 불렀다. 가족의 추억과 재산이 담긴 아파트는 물론 이웃집까지 번져버린 화마는 혜정 씨에게 3억 원이라는 큰 빚더미를 안겨주고 말았다. 하룻밤 사이에 집도 재산도 모두 다 잃고 길거리로 나앉게 된 혜정 씨의 가족. 비로소 혜정 씨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가수’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생계를 위해 무대에 올랐지만 이제는 그 무대에서 잠시 잊었던 꿈을 꾸게 됐다는 데... "2011년 또 한 번의 화재가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어요. 가슴이 또 한 번 무너졌지 만 불이 나면 부자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의 시련이 내일의 축복이 될 거라고 믿 어요.” -김혜정 인터뷰 중 ▶ 우리는 김혜정의 일편단심 열혈팬! 혜정 씨는 이제 자신의 꿈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그녀는 이젠 빚을 갚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대신, 자신의 꿈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노래하고 있다. 그녀의 노래를 외워 멋지게 따라 부르는 큰아들 준영이. 그녀를 위해 평생의 소원이 었던 1집 앨범 전곡을 작사, 작곡해 그녀의 매니저를 자처한 남편 봉진 씨. 묵묵히 그녀를 응원하는 둘째 무영이. 혜정 씨의 재기를 누구보다 응원하는 시어머니... 혜정 씨가 무대에 서는 이유는 언제나 그녀를 응원하는 일편단심 열혈팬! 바로 그녀의 가족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꿈을 위해!’ 포기 대신 전력투구를 선택한 그녀. 다시 한 번 더 높이, 더 멀리 비상을 꿈꾸는 김혜정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녀의 눈부신 내일을 힘껏 응원한다!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8회 2012-12-03MORE
노점상에서 천원짜리 햄버거를 팔던 영철이 형, 햄버거 가게 사장님이 되다! 어느 대학가에 자리 잡은 햄버거 가게, 그 곳에서 환한 웃음을 띤 채 학생들을 맞이 하는 이는 바로 가게 주인 이영철 씨이다. 13년 동안 그 곳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팔 아 온 이영철씨가 만든 한국형 수제 햄버거, 신선한 양배추와 돼지고기를 볶은 양념 에 매콤한 청양고추를 넣어 칼칼함을 더했다. 거기에 만든 이의 정성까지 추가해 골 고루 버무려진 햄버거가 8년 동안 단돈 천원이었다! 한창 잘 팔렸던 때는 하루에 3000개씩, 대학가에서 날개 돋힌듯 팔렸던 햄버거는 맛 좋고 양 많고 가격까지 착해 학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영 철씨가 이 햄버거를 탄생시키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데... 덤벼라! 인생에서는 길거리 노점상에서 출발해 현재의 본점과 직영점 5개를 거느리 기까지, 햄버거 가게 사장 이영철씨의 인생스토리와 1000원짜리 햄버거에 얽힌 사연 을 들어본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서울로 상경한 11살 소년 목걸이공장, 중국집배달원, 봉제공장, 군복공장, 웨이터, 막노동... 수많은 직업을 거 치며 산전수전을 겪다. 처절했던 가난은 아버지의 상여를 리어카로 둔갑시켰다. 어린 11살짜리 소년은 한겨 울에 얇은 티 한 장만을 걸친 채 그 리어카를 끌어야만 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초 등학교를 중퇴하고 형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 11살짜리 소년 영철은 목걸이 공장, 중 국집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또 한번 차갑고 냉정한 사회의 그늘 안에서 오들도들 떨어야만 했다. 이것저것 안 해본일이 없을 만큼 힘들고 고된 어린 시절, 성장해 어른이 되었어도 별 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돈을 벌기보다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만 했던 가 난한 청년 영철은 결혼하여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식구들을 거느린 가 장이 되어 막노동판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한다. ▶신용불량자의 늪, 진창 속에서 빠져나와 새출발을 다짐하다. 그러나 도박의 달콤함에 빠져든 이영철씨는 신용불량자가 되는 처지에 이른다. 좀처 럼 빠져나올 수 없었던 신용불량자란 늪에서 겨우 빠져나온 이영철씨는 마냥 주저앉 아 낙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일어나 다시 한번 새로운 출발을 해 보기로 결심 한다. ▶노점상 성공 신화, 햄버거 장사로 인생역전하다. 그러나...! 리어카 손잡이를 붙잡고 거리로 나선 그, 겨우 자리를 잡은 대학가 앞에서 그가 직 접 연구개발한 햄버거를 판다. 처음엔 무관심했던 학생들도 조금씩 이영철씨의 정성 과 노력을 알아보고 햄버거 맛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그리고 그 조언들 을 양념처럼 조합한 햄버거는 점점 맛있어졌다. 그렇게 탄생한 길거리표 햄버거의 가격은 착한 가격, 단돈 천원! 그렇게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물가는 올랐지만 8년째 제자리 가격, 팔수록 손해를 보는 이상한 상황에 직면한다. 해가 갈수록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가격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타격은 컸다. 그래도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과 노력을 하 게 된다. ▶값싼 햄버거가 아니라 질 좋은 햄버거를 만드려는 아저씨의 노력, 집념, 고집 이영철 씨에게는 욕심이 있다. 그가 만든 햄버거를 먹고 사람들이 더욱 건강해지기 를, 행복해지기를 꿈꾼다. 그래서 항상 믿을 수 있는 좋은 재료를 사용하며 또한 새 로운 신메뉴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사람들 입맛에 딱 맞는 한국형 수제 햄버거를 만 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햄버거 가게 사장, 이영철. 그를 덤벼라 인생을 통해 만나보자.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7회 2012-11-26MORE
1년 365일 말쑥한 양복과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호떡을 굽는 이 남자. 한 때 번듯한 직장에 다니던 시절 주식에 빠져 12억 원의 재산을 탕진하고 사람은 물론 직장까지 잃었던 김민영씨다 . 하지만 현재 500원짜리 호떡 하나로 일본과 미국 그리고 전국각지에 가맹점을 거느린 호떡집 사장님이 되었다. 3.3㎡도 안 되는 길가 노점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해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행복을 굽는 호떡왕 김민영씨를 만나보자. ▶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12억 주식 큰 손이 되다! 한국통신에서 17년간 성실하게 근무하며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온 김민영씨 아내 그리고 세 딸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오던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 터지게 된다. 주변 사람의 권유로 거래하게 된 주식이 12억까지 오른 것! 하루아침에 거금이 생긴 그는 가정과 직장에 소홀하며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니기 시작 한다 쉽게 돈이 생기자 점점 더 욕심이 생겼고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주식투자에만 몰두하는데.. 하지만 2000년 1월 주식시장의 거품이 빠지면서 그의 주식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빚까지 내가며 주식투자에 열을 올렸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운은 따라오지 않았고 빚을 갚기 위해 다니던 직장에서도 희망퇴직을 해야 했다 뜻밖의 행운은 그렇게 거품 빠지듯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연이은 주식 실패로 더 이상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그는 결국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데.. 하지만 삶의 끈을 놓으려고 했던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아버지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난다 "아버지가 나를 두 번 낳아 준거죠 한마디로 말하면 아, 정말 내가 죽을 용기가 있다면 내가 살 용기를 갖는 것이 더 낳겠구나" - 김민영 인터뷰 중 ▶ 호떡으로 연 인생 2막! 밑바닥에서 밑바탕으로 어리석었던 선택을 접고 다시 삶을 선택한 그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해야만 했다. 막노동, 퀵서비스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고 그의 아내 또한 식당일을 하며 부부는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2001년 7월, 마침내 거리의 조그마한 노점을 임대하여 좋아했던 호떡을 팔아보자는 생각으로 호떡 장사를 시작한다. 그는 맛있게 먹었던 호떡을 잘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패기 넘치게 시작한 호떡장사는 순조롭지 않았고 재료상에서 받아쓰던 반죽은 손님들의 입맛을 끌지 못하며 매번 다 팔지도 못하고 남기 일쑤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직접 호떡가게를 돌아다니며 반죽비법을 배우기로 마음먹는데.. "호떡으로 먹고 살려고 호떡 장사를 해야 되는데 (호떡 파시는 분들한테) 좀 가르쳐 줄 수 없냐고 하면 사람들이 아주 막 뭐라고 해요 자기네들 밥줄인 데 누가 가르쳐줍니까 안가르쳐주죠" - 김민영 인터뷰 중 그렇게 몇 날 몇 일 씩 유명 호떡집을 찾아다닌 끝에 드디어 호떡 만드는 노하우를 배우게 되는데.. 그렇게 한 달 동안 호떡 반죽에만 매달려 어깨 너머로 배우고 직접 만들어 보며 비법을 터득하게 된 것! 순식간에 입소문이 난 민영의 호떡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어나 새로운 삶으로의 밑바탕을 쌓아가기 시작하는데.. 12억과 맞바꾼 500원의 행복! 호떡왕 김민영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를 만나보자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6회 2012-11-19MORE
연 매출 400억! 기능화 업계 1위! 중졸 출신의 가난한 소년, 구두회사 CEO되다! 회사 옆에 승마장을 만들고 벤츠 자동차와 수상보트를 구입하여 직원들의 취미생활을 장려하는 별난 사장님, 직원이 행복한 회사를 꿈꾸는 구두장인, 김원길 대표를 만나보자. ▶가난한 산골 소년, 구두회사 사장을 꿈꾸다 "중학교 다닐 때 아침에 학교가기 전에 엄마 나 돈필요해요. 그러면 돈 빌리러 옆집으로 굉장히 뛰는 걸 봤어요." -김원길 대표 인터뷰 中 - 중학교를 졸업하고 열여섯 나이에 서울로 상경한 원길. 돈을 벌기 위해 시골을 떠나왔지만 그가 가진 거라곤 작은 아버지에게 배운 구두 기술이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작은 구둣방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그는 야무진 눈썰미와 지독할 정도의 성실함으로 유명구두회사에 스카우트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기술직 월급 100만원을 포기하고 4분의 1도 안 되는 25만원의 관리직을 선택한다. 구두 공정 전체를 살피는 안목을 키워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사장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매출 부진으로 백화점에서 퇴출 통보를 하자 그는 자진해서 영업파트로 전환한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당당히 1억 매출을 올린다. "그 당시에 월 매출액 1억 천만 원. 진짜로 1억 천만 원 팔아냈어요. 한 달에.” -김원길 대표 인터뷰 中- ▶‘시련이 나를 키웠다’ 영업 매출 1억을 두고 회사 내에 뜬소문이 돌았다. 억울함과 배신감으로 그는 8년간 머문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퇴직금 200만원으로 신발 자재공장을 차리는 것, 여기에 유명구두회사 판매 대행도 함께했다. 그러나 또 다시 그의 인생에 시련이 닥친다. 90년대 중반, 상품권 남발로 인해 유명구두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다. 김원길은 돈의 가치가 사라진 상품권을 구두와 교환할 수 없었다. 팔지 못해 쌓아둔 구두와 자금 압박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4년간 하루하루가 절망이었다. 김원길은 그 당시를 악마의 터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한 4년 간 악마의 터널... 전 그걸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냥 나중에 너무 힘드니까 각오합니다. 이렇게 사는 바에 죽는 게 낫 겠다. 죽어 버리자 그까짓 것. 순간에 그냥 마음먹고 핸들을 한강으로 밀어 버리면 끝난다." -김원길 대표 인터뷰 中- "네가 힘들다고 죽으면 너는 아주 무책임하고 나쁜 놈이다.” 친구의 독설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죽을 각오로 다시 살아보자 다짐했다고 한다. 그 후 김원길은 잘 팔리는 상품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편안한 구두를 모토로 바닥이 넓고 푹신한 신발을 만들어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발에 신는 순간 이거 최고인데? 이 소리 나올 수 있을 제품 만드는 게 최고가 아닌 가, 우리 회사의 미래는 상품개발에 달려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원길 대표 인터뷰 中- 가난한 중졸학력의 기능공으로 시작해 견실한 회사를 일궈낸 구두장인 김원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자.
덤벼라!인생-휴먼스토리 5회 2012-11-12MORE